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
- 최초 등록일
- 2000.10.05
- 최종 저작일
- 20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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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조광조
본문내용
-조광조는 조선 중종때의 대표적인 도학자이다.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며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조원강(趙元鋼)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선 그의 가문을 알아보자.
정암은 한양인인데, 그 상세선계(上世先系)의 공열은 그만두고서도 5대조 인벽(仁璧)은 처남인 태조가 혁명하고 삼징칠벽(三徵七)하였건만 끝내 불사이군의 의를 지켜서 나서지 아니하고 양양으로 피신하여 자질과 후학을 가르치면서 수절하여 지금까지 그곳에 공을 모신 동명서원(東溟書院)이 전한다. 양열공의 아들 온은 선생의 고조인데 비록 청백한 고절이 있으면서도 국초에 혁명으 주체인으로 청백에 자처하지 않았다. 양절공의 청백은 그으 시호를 보아도 족히 증명이 된다. 즉 "시호를 '양절이라 내렸는데 시호법에 온화하고 어질고 낙을 좋아하며 청렴하여 스스로 극복한다'는 것을 이름이다"라고 세보에 보여주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후손 문절공(文節公) 원기(元紀)는 정암의 숙부이기도 한데, 한양 조씨 최초의 족보를 편찬하면서 서문에 이르기를,
양절공, 양경공께서 효하고 청렴하고 충의함으로써 모두 좋은 시호를 얻으셨다. 그리고 양절공은 삼대를 도운 공이 모두 의로 이루었고, 공훈으로 얻으신 것은 가난한 여러 종족들에게 흩어주시고 초가집 두어 칸으로 말을 돌릴 수 없었고, 음식은 좋은 맛이 없고, 앉으심에 자리를 겹으로 하지 아니하여 나이 팔십이 되신 후에도시종 한결같이 하시었다. 이는 우리집이 대대로 지킨 업으로서 우리 선대부에 미쳐서 일찍이 용방에 오르시고 공이 사문에 중히 되었으니, 비록 지위가 덕에 차지는 않으시면서도 그 효와 청렴은 양절공보다 못하지 않으셨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