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안창호의 업적과 일생

등록일 2000.09.05 텍스트 (txt) | 4페이지 | 가격 3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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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그는 흥국(興國)의 셋째아들로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선대는 대대로 평양 동촌(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에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로 옮겨왔다.

8세까지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9세에서 14세까지는 강서군 심정리에 머물며 김현진(金鉉鎭)에게 한학을 배웠다. 이때 서당 선배인 필대은(畢大殷)을 알게 되어 그로부터 민족주의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받았다.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국력배양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상경하여 언더우드(Underwood, H. G.)가 경영하는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3년간 수학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서구문물과 접하게 되었다.

독립운동 참여
▶ 독립운동과 애국계몽운동

독립운동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필대은과 함께 평양에서 관서지부조직을 맡게 되었다. 이때 평양지회 결성식이 열린 평양의 쾌재정(快哉亭)에서, 감사 조민희(趙民熙)와 수백군중이 모인 가운데 18조목의 쾌재(快哉)와 18조목의 부재(不哉)를 들어 정부와 관리를 비판하고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1898년 서울 종로에서 이상재(李商在)· 윤치호(尹致昊)· 이승만(李承晩) 등과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였다.

1905년 11월의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국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이듬해에 귀국하였다. 귀국길에 일본 동경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우리나라 유학생단체인 태극학회 (太極學會)의 청년들을 만나 국내정세에 대한 지식을 얻고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909년 10월에 있었던 안중근(安重根)의 이토(伊藤博文) 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3개월간 일제에 의하여 피체되었다가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산동성에서 민족지도자들과 청도회의(靑島會議)를 열었다.

청도회의는 북만주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만들어 영농과 군사양성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자금관계와 급진파의 반대로 실패하였으며, 이에 시베리아를 거쳐 1911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28년에 상해에서 이동녕· 이시영(李始榮)· 김구(金九)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제창하였다.

애국계몽운동

1899년에는 강서군 동진면 화암리에 강서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하였다. 점진공부와 수양을 계속하여 민족의 힘을 기른다는 교육목표를 설정하였으며, 초등과정의 남녀공학을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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