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신사 유람단

등록일 2000.09.04 한글 (hwp) | 10페이지 | 가격 4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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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21세기를 눈앞에 둔 오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정세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서세동점의 높은 파고가 휘몰아치던 19세기와 냉전체제가 붕괴된 이후 20세기말은 양육강식 논리가 더욱 기승을 부린다는 점에서 매우 흡사하다. 100년 전 조선은 서구 열강을 비롯하여 청나라와 일본의 침략에 직면해 국가존립의 기틀을 새롭게 다지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주요한 과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1880년대에 이르러서 조선에서는 세계역사의 발전방향에 순응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예 하나가 동래암행어사 12명의 일본 사찰이다. 1881년 초 조선은 일본 근대문물을 탐험함으로써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시찰단은 종2품에서 정4품까지의 관료 12명과 이들이 개인적으로 선발한 수행원 27명, 일본인 통역 2명을 포함한 12명의 통역관 및 하인 13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1881년 4월 11일부터 윤 7월 1일까지 약 4개월 동안 일본에 가서 메이지 시대의 제도와 문물을 빠짐없이 고찰했다. 이것은 우리 역사상 서구 근대문물의 수용을 본격적으로 도모하고, 나아가 일본을 조선 근대화의 모형으로 설정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모색한 최초의 시도였다. 그리고 조사시찰단원 대부분이 일본 시찰활동 이후 근대 조선의 앞길을 주도한 인물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조사시찰단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와 한계를 제대로 살펴보는 작업은 한 세기 전 우리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1881년 4월 3일, 사방에 어스름이 깔리자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영가대 정자 앞에서는 해신재가 시작되었다. 조사와 수행원으로 구성된 이들 조사시찰단이 화륜선에 오른 까닭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고부터 서구의 근대문물을 받아들여서 한껏 부강함을 과시하고 있던 일본의 발전상을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조사시찰단 일행 대부분은 조선 국경을 넘어 타국 땅을 밟는 것은 난생처음인데다, 이미 일본을 다녀왔던 두세 사람을 빼놓고는 배를 타본 적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제문을 읽는 이나 그것을 듣는 이들의 표정 못지않게 이날의 제문 역시 비장감이 감도는 게 당연한 듯하다. 우리나라가 무엇인가를 배우려 한 것은 유사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사의 직함은 공식적으로 동래암행어사였다. 그리고 이들은 공식 외교사절이 아나리 민간인 자격으로 일보의 제도와 문물을 직접 눈으로 접하고 피부로 접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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