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개화사상과 척사운동

저작시기 1997.01 |등록일 2000.06.14 한글 (hwp) | 3페이지 | 가격 1,000원

목차

Ⅰ. 머리말

Ⅱ. 개화운동과 척사운동

Ⅲ.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조선에 있어서 근대적 개혁의 흐름은 19세기 후반에 일어나게 된다. 제국주의의 식민지화의 위기에 처해있던 조선에서는 부르주아 개혁파였던 개화파의 개화사상이 있었고, 유림 중심의 위정척사운동 또한 있었다. 구미의 충격에 대하여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 자본주의 방향으로 대응한 것이 개화사상 이었고, 유교에 의한 복고주의적 입장에서 구미와의 대결을 한 것이 위정척사론 이었다. 서로 대치되지만 공존하는 이 두 개의 사상과 운동을 현대에 비추어 고찰해보고자 한다. 사회적 모순과 민족적 모순은 개항 당시 그 상황과 현재 아주 흡사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개화운동과 척사운동의 내용과 한계를 비교․분석해서 현대의 한국사회를 알아보려고 한다.

Ⅱ. 개화운동과 척사운동
1. 개화운동
1)개화운동의 내용과 한계
조선에서 개화라는 말이 쓰인 것은 대략 1880년대부터라 하는데, 이는 1870년대 일본에서 유행한 ‘문명개화’라는 말이 1876년 개항 후 조선에 들어온 것이라 한다. 처음 개화사상을 갖게 된 데는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이 있다. 먼저 내적 요인은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영향이다. 다음으로 외적요인은 청을 통해서 접한 새로운 지식이 영향을 미친 것이다.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며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한 변법론적․급진적 개혁을 추진한 개화파를 급진개화파라 했는데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등이 있었다. 그리고 정부요직에 있으면서 청에 대한 종속을 인정하고 청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한 양무론적․점직적 개혁을 추진한 개화파를 온건개화파라 했는데 김윤식, 어윤중, 김홍집, 민영익 등이 있었다. 대체적으로 볼 때 일찍이 개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 수용을 주장한 사람들은 급진개화파 계열이었으나, 정부요직에 있으면서 실제로 개화정책을 추진한 서 사람들은 온건개화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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