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운동과 척사운동

등록일 1999.02.07 한글 (hwp) | 11페이지 | 무료

본문내용

1. 개화사상의 형성

조선에서 개화라는 말이 쓰인 것은 대략 1880년대부터라 하는데, 이는 1870년대 일본에서 유행한 '문명개화'라는 말이 1876년 개항 후 조선에 들어온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개화사상이 정확히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 알기 어렵지만, 일찍이 문호개방을 주장한 박규수(朴珪壽)·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등이 그 선구적 역할을 하였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북학파(北學派)의 거두였던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박규수는 두 차례 청에 가서 서양문물의 우월성과 개항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으며, 오경석은 실학자 김정희(金正喜)의 제자로서 수차례 청을 다녀온 역관이었고, 유홍기는 의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밖에 정약용(丁若鏞)과 김정희에게 수학하였으며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를 보고 신무기를 만든 신헌(申櫶), 역시 김정희의 문하로 두 차례 청을 다녀온 바 있던 강위(姜瑋)등도 초기 개화사상가에 넣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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